서유럽/이탈리아

성베드로의 무덤위에 세워진 산피에트로 대성당(성베드로 대성당)

노미킴 2012. 1. 15. 08:00

시스티나 성당에서 나와서 간 곳은 성베드로 대성당이었다.

 

성베드로 대성당은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건립하기 시작해 1615년 교황 파울루스 5세때 완성되었다.

삼랑식 라틴 십자형 평면으로 되어 있으며 사도 베드로의 성골함을 덮고 있는

주제단 바로 위의 십자형 교차부에 돔이 올려져 있다.

 

그러니까 교황의 교회로 쓰이는 성베드로 대성당은 성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것이다.

지금은 관광객들의 주요 관광지로, 카톨릭 성도들의 중요한 순례지로 빼놓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 대성당 내부에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걸작품으로 가득차 있다.

이 가운데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Pietà), 베르니니가 만든 주제단 위의 천개,

교차부에 있는 성 롱기누스의 조상(彫像), 우르바누스 8세의 묘, 앱스에 있는 청동제의 성베드로 주교 등이다.

 

이렇게 훌륭한 작품들이 있고 의미가 있는 대성당에 왔으나

바쁘게 움직이고 단체가 이동하다 보니 사진도 잘 담지 못하였고,

허둥대다 주요한 것을 놓치기도 하는 우를 범했다.

 

열심히 촬영하였으나 흔들린 사진이 많아 올리기도 좀 그렇지만 그래도 다녀온 흔적이니 올려본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정면 모습부터 올려 본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내부 모습이다.

너무도 큰 대성당의 모습에 압도 되고 무엇을 먼저 보아야 할 지 모르겠는데다가 시간은 없고

많은 사람들로 혼잡하여 마음이 더 조급했던 것 같다.

 

 

베르니니가 만들었다는 주제단 앞의 '천개' 이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1568-1644)의 명에 의해 제작된 이것은,

그 위에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거대한 돔과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양대 예술 양식중 최고의 예술 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천개를 제작하기 위해 필요했던 막대한 양의 청동 금속은 이탈리아에서 모아졌는데,

그 중에서도 베네치아 지방에서 많은 양이 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아진 금속의 양은 211,427파운드에 달하였다.

그런데도 양이 부족하자, 마침내는 로마에 있는 기원전 1세기 때의 신전인 판테온의 내부 천장의 청동을 떼어서 충당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비판의 소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이것은 바르바리(야만인이라는 뜻)가 한 게 아니라,

바르베리니(교황의 가문)가 한 일이다."라는 말로써 교황을 비꼬기도 하였다.

이 천개를 직접 구상하고 설계한 베르니니는, 후에 자신의 아이디어는 인간의 영혼이 하늘로 올려지는 것에서 착안되었다고 했다.

내부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성령의 빛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고,

위쪽으로는 네 명의 천사가 화관(花冠)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또 다른 작은 천사들은 삼중관과 열쇠, 칼 그리고 복음을 들고 있다.

이 중에서 삼중관과 열쇠는 사도 베드로를 상징하며, 칼과 복음은 사도 바울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실상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돔~!

피렌체에서 두오모성당을 보았을때 돔형 지붕을 갖고 있었는데 세계에서 그런 돔지붕을 최초로 올렸다고 설명을 들었던 것 같다.

피렌체에 살았던 미켈란젤로가 그 돔 지붕을 보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 이렇게 큰 돔을 넣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제대 밑에 교황 인노첸시우스 11세의 유해가 크리스탈 관에 넣어져 안치 되어 있다.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다~!

미켈란젤로의 나이 25세에(1499년) 이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피렌체에서 보관 중인 다비드상, 그리고 성베드로의 쇠사슬덩당에서 보관중인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에 들어간다.

작품에 서명을 남기지 않기로 유명한 미켈란젤로가 유일하게 서명을 남긴 조각상이기도 한 피에타상은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시체를 매장하기 전 마지막으로 죽은 아들을 무릎위에 안아보는 모습으로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라고 한다. 

성모 마리아의 한 손은 예수를 안고 있고 나머지 한 손은 하늘을 향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녀의 처절한 기도가 들리는 듯 하다.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기도 하고 가까이 갈 수가 없어 더욱 사진을 찍기 힘들었다.

 

 

 

미켈란젤로가 피에타상을 만들게 된 전해지는 이야기~! 

 

미켈란젤로가 어느 날 대리석 상점 앞을 지나다가
그 집에 있는 커다란 대리석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대리석 값을 물었지요.
그러자 상점주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돈을 내지 말고 그냥 가져가십시오.
지난 10년간 그것을 팔려고 했지만
아무도 사가지 않았습니다.
가게는 비좁은데 그것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여간 골칫거리가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그냥 가져가십시오.”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그 대리석을 공짜로 얻었습니다.

그리고 1년 후 미켈란젤로는 그 대리석 주인을
자기 작업실로 초대했지요.

상점 주인은 자신이 공짜로 준
대리석으로 만든 작품을 보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는 피에타, 즉 성모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님을 안고 있는 상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가게 주인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까?”
이 말에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네요.


"제가 이 대리석 앞을 지나치려 하는데,
예수님께서 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나는 지금 이 대리석 속에 누워 있다.
불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내 내 모습이 드러나게 하라.

 대리석 안을 들여다
본 저는, 어머니 무릎에 누운 예수의 형상을 보았고,

저는 단지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불필요한 부분을 없앴을 뿐이었습니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커다란 대리석 안에 담긴
피에타 상을 찾아내었던
미켈란젤로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들의 모습을 문득 반성하게 됩니다.
겉으로만 드러나는 부분만을 좋아하고 사랑했던
우리들의 편협된 모습들을...,

자료집에서 발췌한 피에타상~!

 

사진을 담느라 늦게까지 있는 내게 어떤 부부가 사진 한 장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중요한 곳에서의 사진이니 정성을 다해 담아 드렸다.

그랬더니 그 분은 답례로 내게도 한장 찍어 드릴테니 서보라고 권한다.

고마운 마음에 카메라를 맡기고 성당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섰는데.... 보시다시피 그림이 이렇게 나왔다...^^

 

 

그런데 이곳 대성당에서의 사진은 모두가 요모양이다.

주제단과 천개가 보이는 곳에서 아우와 한장 담은 것도 요모양, 나머지 사진도 모두 그렇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보고 나올 때 사람을 놓친 줄 알았더니  다시 보니 시스티나 성당에서 나왔을때 일행을 놓친 것 같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일행이 같이 나오기 힘든 상황이니 가이드의 깃발을 보고 잘 따라 나오라고 했건만

울팀 중 2명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나가는 복도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저렇게 주욱 서서 기다리고

가이드는 헐레벌떡 뛰어가서 찾고 난리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지체하였으면 안그래도 빡빡한 일정이 더 꼬일 뻔 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20여분 지체한 뒤에 가이드가 땀을 흘리며 사람을 찾아 돌아왔다.

 

아래 그림은 놓친일행을 기다리던 울 일행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제 밖으로 나가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광장을 둘러 볼 차례이다.

밖에 광장에서 보게 될 것들을 포함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지어진 역사를 백과사전에서 발췌해 옮겨 본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진 역사를 소개한다.

1506년 4월 18일 율리우스 2세가 새 바실리카를 위한 초석을 놓았고

건물은 도나토 브라만테가 설계한 평면에 따라 그리스 십자형 평면을 수정해

기둥으로 삼랑식 라틴 십자형 평면으로 바꾸었다.

 

1520년 라파엘로가 죽은 뒤 후임 건축가로 대(大)안토니오 다 상갈로와 발다사레 페루치, 안드레아 산소비노가 임명되었다.

1527년 로마가 함락 당한 뒤 파울루스 3세(1534~1549년 재위)는 이 공사를 소(小)안토니오 다 상갈로에게 맡겼고 

상갈로는 다시 브라만테의 설계를 답습하여 새 바실리카를 지을 공간과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구 바실리카의 동쪽 부분 사이에 분리벽을 설치했다.

상갈로가 죽자(1546년) 파울루스 3세는 앞서 율리우스 3세와 피우스 4세때에도 수석 건축가로 일했던 

노령의 미켈란젤로에게 다시 일을 맡겼다.

미켈란젤로가 죽은 1564년 당시에는 거대한 돔을 받칠 드럼(원통형 구조물)이 사실상 완성되어 있었다.

그의 후임자는 피로 리고리오와 자코모 다 비뇰라였으며 그 뒤 그레고리우스 13세(1572~1585 재위)의 위촉으로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공사를 진행했다.

미켈란젤로가 변경했던 돔 설계는 식스투스 5세(1585~1590재위) 의 고집으로 마침내 완성되었고,

그레고리우스 14세(1590~1591재위)의 명령으로 돔 위에 랜턴(채광창)이 세워졌다.

클레멘스 8세(1592~1605재위)는 구성베드로 대성당의 앱스를 헐고나서 칼릭스투스 2세의 제단 위에 새로이 높은 제단을 세웠다.

파울루스 5세(1605~1621재위)는 동쪽으로 네이브를 확장시킴으로써 라틴 십자형으로 변형시킨 카를로 마데르노의 계획안을 채택했고,

이에 따라 길이 187m에 이르는 주 구조물이 완성되었다.

마데르노는 또한 이 바실리카의 정면을 완성했으며 정면 양쪽 끝에 캠퍼닐(종루)을 받치기 위한 여분의 베이를 덧붙였다.

마데르노는 2개을 캠퍼닐을 설계했으나 하나만 지어졌고,

다른 하나는 1637년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설계한 다른 모양으로 세워졌다. 

베르니니는 알렉산드르 7세(1655~1667재위)의 위촉을 받고 콜로네이드(柱廊)로 둘러싸인 타원형의 광장을 설계해 바실리카의 진입로 역할을 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