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며...
일요신문에 난 막내아들의 기사 본문
내 막내아들의 기사가 일요신문에 났다.
이 신문기사를 보면서 아이들이 어렸을때 일들이 떠오른다.
내겐 삼남매가 있다.
제일 위로 딸아이가 있고, 아래로 아들 둘을 두었다.
내가 막내아이를 출산 할 무렵에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가 있을 때이다.
그러니 막내아이를 임신했을때는 못들을 소리(야만인, 미개인)도 많이 들었었다.
그런 막내가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나를 기쁘게 한다.
큰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이고 이 아이가 중학교때 였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삐삐'(호출기)라는 것이 나온 것이...
내가 살고 있는 강남이라는 지역 특성상 주변의 아이들이 모두 갖고 있는 삐삐를 갖고 싶어하는 것을 못 본척 하였었다.
그랬더니 집 앞에 있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여 삐삐를 구입하는 것이다.
그후에 핸드폰이 나왔을때도 마찬가지였다.
내 상식으로 아이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쓸 일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또 모른척 하였다.
그러나 우리집 형제들은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위하여 알바를 한다.
공부할 시간을 쪼개어 알바를 해서 핸드폰을 구입하는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생각없이 사용한 핸드폰사용료가 그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절대 핸드폰 요금을 내어 주질 않았다.
그럼 핸드폰은 사용정지가 되고, 방학이 되면 부족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알바를 하여 핸드폰 요금을 벌고...
핸드폰이 안되는 동안은 집전화로 친구들의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니 집전화요금도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그래서 집전화도 사용정지를 시켜버린다.
이렇게 아이들과 전쟁하듯 살아오는 동안 아이들이 훌쩍 자란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것을 위하여 노력하고 바르게 살아온 것이 너무 너무 감사하다.
성적이 중요하지 않았다.
인성이 바로 되고 자기 자신을 아낄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길 바랬다.
그래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노력하길 기도했다.
일요신문에 난 기사를 보면서 대견하기도 하지만 부모로서 너무 해준 것이 없었다는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 일요신문 기사 ♧
# 모의고사 성적 평균 24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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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문을 연 조 씨는 인터뷰 내내 겸손한 모습이었다. 그는 “시급 900원 받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편의점,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전까지 수학 50점을 넘어본 일이 없다”고 회고했다. 그랬던 조 씨에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간에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한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유명 패스트푸드점에서 1년 반 동안 일했는데도 시급이 50원밖에 안 올랐던 것이다.
그는 순간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렇게 살다가는 나중에도 돈 몇 푼 못 벌고 빌빌대며 살겠구나’하는 생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위기감을 피부로 절감한 조 씨는 고3이 돼서야 처음으로 모의고사를 치렀다. 당시 성적은 평균 24.4점. 대학에 발을 디딜 수조차 없는 처참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의지를 불태우며 하루 4시간만 자고 공부를 했다. 그런데도 결과는 시원찮았다.
조 씨는 “가끔 TV에서 꼴찌였다가 열심히 1년간 노력해서 서울대 갔다는 사람들의 일화가 나오는데, 평범한 나에게는 그런 기막힌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난 평범했다”고 회고했다. 조 씨는 삭발 후 2년간 더 공부했지만 노력만큼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군에 입대한 그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불굴의 의지를 다진 끝에 휴가 중 수능을 쳤다. 삼수 끝에 좋은 점수를 받고 동국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 후에도 그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배우고 싶은 게 많아 필요한 책들도 많았고 대학원 진학까지 고려하다보니 돈이 필요했다. 이에 조 씨는 택시기사 자격증을 땄고 곧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그는 대학 4년 내내 저녁 7시까지 수업을 듣고 밤 10시까지 도서관에서 복습을 마친 후 새벽 4시 무렵까지 대리운전을 했다. 당시 조 씨의 지인들은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웬만한 사람이라면 유혹 많은 20대 초반에 4년간이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밤에 일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조 씨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손님이 생기면 곧바로 달려갔다. 문제는 강남 쪽에서는 내가 접해보기 힘든 고급차를 모는 손님이 많았다”며 “혹시라도 대리운전 시 손님 차를 상하게 할까봐 주말에는 발레파킹 아르바이트도 겸해서 했다”고 말했다. 발레파킹을 하다보면 다양한 차종을 운전할 기회가 생기기 때문에 좀 더 손님의 차를 안전하게 몰 수 있을 것이란 생각 때문에서였다.
대리운전 하나에도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던 덕에 단골도 늘었다. 대리운전을 하는 평균 연령대는 일반적으로 40대 중반 선이다. 동료 대리 기사들은 거의 아들뻘인 조 씨를 바라보며 “정말 대리 운전하는 것 맞느냐. 어쩌다 이렇게 됐느냐”며 걱정도 많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알게 된 한 동료 기사는 “내 아들과 동갑인데 어쩜 이렇게 다르냐”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고 한다. 하루 종일 대리운전하고 공부하느라 제대로 놀 시간도 없었지만 이렇게 모은 돈으로 훗날 더욱 심도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 씨는 힘이 절로 났다.
계획적인 습관 덕인지 성적도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대학 8학기 내내 장학금을 받았고, 대학원 진학 당시 전체 수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신기하더라고요. 어디 가서 1등한 적이 없었는데…”라고 담담히 읊조리던 조 씨는 몇 년 전 이공계 출신의 꿈이라는 포항공대 대학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포항공대 대학원은 국내에서 가장 입학하기 어려운 대학원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대학원에서의 재밌는 일화를 소개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가끔 회식 후 교수님들 차를 대리 운전해드렸다. 주차 실력에 다들 놀라시더라”며 웃어보였다. 최근 조 씨는 대학원 졸업 후 국내 유명 대기업에 입사가 확정됐다고 한다.
그는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대체할 수 없는 인력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뭐든지 꿈을 갖고 노력하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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