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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 도미티아누스신전, 멤미우스의 비, 아스클레피온병원과 폴리오샘 본문

중동/터키

에페소 - 도미티아누스신전, 멤미우스의 비, 아스클레피온병원과 폴리오샘

노미킴 2012. 12. 12. 02:33

플리타네이온 앞에 있는 바실리카거리를 걸어 내려오면

왼쪽으로 도미티아누스 신전과 아스클레피온병원터의 표식이 보인다.

 

우리를 데리고 다니며 설명하는 가이드는

걸어가면서 노란 장갑이 끼워진 작대기로 가리키며 설명하는데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사진찍으랴 설명들으랴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사진과 간단한 메모로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아~! 그거 였구나 한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여행을 하는 느낌을 가져 좋긴 하지만

조금 씁쓸하긴 하다.

 

 

▼도미티아누스 신전

 

 

 

울 가이드 노랑장갑이 꽂힌 작대기로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ㅎㅎ

 

 

 

 

 

 

플리타네이온(시청자리)에서 약간 완만하게 경사진 길을 내려온다.

이 길의 왼쪽이 아스클레피온병원터 라는 이야길 들었다.

 

 

 

 

 

 

지나온 길을 밑에서 위로 올려다 보며 한컷~!

 

 

 

그렇게 내려오는 동안 오른쪽에 보이는 건축물에 있었을 장식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지난번 그리스에서도 보았던 문양이다.

실크로드를 통하여 동양에서 전해져 온 문양이라는 이야길 들었는데...

 

 

 

 

 

 

 

아래 부조가 새겨진 표지석을 놓고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

바로 아스클레피온병원터에 있는 표지와 같은 표지석이기때문에 이 뒷쪽이 병원터 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너편에 보이던 건축물의 부서진 장식물들이 이 병원 것은 아니었을까~?

 

세계 최초의 병원인 아스클레피온(Asklepion)의 출발은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로부터 계시를 받아 치료했던 성역으로

의술의 신에게 바쳐진 종합병원이라 할 수 있다.

 의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인 에게 해의 코스(Kos )섬에 아스클레피온이 있었다고 한다.

고대 로마제국 당시 의사로 유명했던 갈레노스가 고향이었던 페르가몬(Pergamon)에 아스클레피온을 세우고

이곳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체계적으로 의학의 이론과 치료법을 정립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아스클레피온의 상징은 뱀 기둥인데, 허물을 벗는 뱀은 생명과 재생을 상징한다.

 

'아스클레피우스' 라는 의술과 치료의 신이 있는데

이는 아폴로의 아들로 아픈사람을 치유하는 의술과 치료의 신이었다고 한다.

결국 제우스신이 그가 불멸의 능력을 얻을까 두려워하여 번개를 쳐 죽였다고 하는데...

그의 상징이 지팡이에 뱀을 감고 있는 모습이란다.

 

지금도 각국 병원의 의사마크가 지팡이에 뱀이 감겨있는 모습이라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병원터를 상징하는 뱀과 지팡이 모습의 부조가 있는 바로 옆에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부조 되어 있다.

 

 

 

병원이 있었다는 표지석 뒤의 병원터로 보이는 곳과 폴리오샘의 모습이 보인다.

아스클레피우스가 치료를 할때는 샘(물)이 꼭 있어야 한다고 한다.

치료를 받고 샘물에 목욕을 하고 나면 치유가 된다는...

그래서 아스클레피온 병원터 옆에 폴리오샘이 있는 것이라는...

 

 

 

 

 

 

 

폴리오샘의 오른쪽 옆으로 도미티아누스 신전이 보인다.

도미티아누스 신전은 로마의 폭군이었던 도미티아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이라고 하며

1세기경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악명이 높은 폭군 황제였다고 한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여 사도 요한을 밧모섬에 유배시킨 것도 도미티아누스 황제이었으니까...

 

2층으로 지어진 이 신전에는 토대를 포함해 7m가 넘는 도미티안 황제의 동상도 세워져 있었으나

황제가 암살된 뒤 신전은 파괴되고,

동상도 파괴되었으나 주먹을 꽉 쥔 팔은 셀축 고고학 박물관에

원형이 제대로 남아있는 머리부분은 이즈미르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폐허나 같은 모습이지만 남아 있는 신전의 모습을 보아도

그 당시 얼마나 아름다운 신전이었을지 짐작이 가는 모습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도미티아누스 신전 바로 앞 광장 한쪽에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의 부조 돌덩이를 본다.

니케 여신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승리의 월계관~!

 

스포츠용품으로 유명한 니케의 마크가 이 니케여신의 치마자락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우리에게 익숙한 니케 여신의 모습을 아주 가까이 에서 보게 되어 우린 즐겁지만

아무렇게나 광장에 던져지듯 있는 니케여신의 모습이 조금 안타깝다.

 

 

 

 

그리고 도미티아누스 신전의 맞으켠에 있는 멤미우스의 기념비~!

(시청에서 내려오면 오른쪽에 있다.)

 

로마 공화정 시기(BC5세기 이후 500여년간)에 에페소는 과중한 세금 부과로 인하여

로마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에페소인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폰토스의 왕인 미트리다테스 6세를 지지했다.

미트리다테스는 하루만에 로마시민 8만여명을 무차별 학살할 정도였으나

로마의 최초의 종신독재관이며 개혁가인 술라(Sulla)에게 패하게 된다.

이후 에페소인들은 미트리다테스의 대학살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막대한 세금을 로마에 내야 했다고 한다.

 

이 멤미우스비는 그때 대학살 당한 로마인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BC86년에 

술라의 사위 가이우스 멤미우스에 의해 세워졌고 .

멤미우스는 이 기념비에 장인인 술라에 대한 칭송의 글들을 새겼다고 한다. 

 

 

따라서 이 멤미우스의 비는 에페소 에서의 로마의 권위의 상징하기 위한 술라를 칭송하는 기념비이고,  

이곳에서 죽임을 당한 로마인에 대한 추모비인 것이다.

허지만 이 기념비도 온전하지는 않다.

 

 

멤미우스비의 내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학생들은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헤라클레스 문으로 나서서 크레테스거리로 가기전 무화과 나무아래서 가이드와 인증샷을 날린다....

 

 

 

 

 

 

지금까지는 윗동네 귀족들이 사는 곳, 정치 경제가 있는 곳이었다면

앞으로 갈 곳은 서민들의 삶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