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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며...

성인들의 삶이 녹아 있는 '연풍성지' 본문

여행/아름다운 강산

성인들의 삶이 녹아 있는 '연풍성지'

노미킴 2012. 9. 12. 00:30

연풍은 산골이다.

내가 처음 연풍에 있는 시댁으로 인사를 갔을때에는 1977년 겨울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고속버스가 없었다.

 

도로포장을 하고 있는 중이라

포장이 된 도로와 포장이 안된 도로를 번갈아 가며 가느라

직행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몇번을 버스 천정까지 뛰어 올랐다 내려왔다 하며 연풍에 갔었다.

 

연풍의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여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 보았을때

온통 높다란 산들만 보이는 산골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백두대간 줄기인 소백산맥의 자락이 이어지는

높은 산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심심산골에 연풍성지가 있는 것이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하나도 아니고 두개 이상이 뚫려 있는 교통이 아주 좋은 곳이지만

옛날에는 도둑들이 들끓는 문경새재가 곁에 있는 산골이었다.

 

그렇게 경상북도와 충청북도를 오가는 길목에 있고,

산속처럼 숨기 좋은 곳에 있어서

옛날 천주교 박해를 피하여 천주교인들이 이곳으로 모여 들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남편의 고향이요 나의 시댁이라 벌초를 위해 내려 왔다가

작은댁에서 하는 식당 바로 앞에 있는 연풍성지를 들려 보았다.

 

내가 결혼해서 연풍에 몇년 살 동안에는 이곳이 그렇게 유명한 성지인지 몰랐다.

가끔 장터(연풍면시내)에 있는 한의원 사모님이

성당에 순례온 사람들을 위해 문을 열어주러 가는 것을 본 적은 있었지만...

(그곳 열쇠를 그 한의원 사모님이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에 천주교 신자라면 '연풍성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연풍성지'가 바로 내 눈앞에 있으니

조용히 성지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원래 이곳이 연풍성지를 들어서는 입구 이지만

 

 

 

나는 작은댁에서  들어가다 보니 뒷쪽으로 들어가 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작은댁의 식당 건너편에 있는 길로 들어가면 이런 '사색의 길'이라는 곳부터 시작한다.

 

 

 

'사색의 길'을 들어가다 오른쪽을 보니 콩밭 너머로 교회의 십자가가 보인다.

 

 

 

그리고 만나는 성모 마리아상~!

그 앞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촛불을 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의자들도 준비 되어 있었다.

 

 

 

 

 

 

 

 

 

성모 마리아상을 마주 보며 오른쪽으로 이동하니 형구틀이 나온다.

1866년의 병인박해때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이 형구틀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천주교 신자들을 형구틀 구멍앞에 세운 다음,

목에 밧줄을 걸고 그 밧줄을 저 구멍밖으로 낸 다음 뒤에서 밧줄을 잡아 당겨 죽이는 잔혹한 형구틀이다.

 

병인박해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각 처에서 체포되자 

박해자들이 손쉬운 처형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이 '형구틀'이다.

 

'대군 대부이신 하나님께 죄를 짓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신앙을 증거한 신앙선조들은

밧줄이 목의 살갗을 파고 들어 피가 나고 숨이 끊어 질때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형구틀에는 아직도 핏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동안 연풍성지에는 3개의 형구돌이 발견 되었는데,

1964년에 발굴된 첫번째 형구돌은 절두산순교기념관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972년에 발굴된 두번째 형구돌은 성지내(內)  성황석두루카 묘소 정면쪽에,

1992년에 치명터 50m지점에서 발굴된 세번째 형구돌은 

대형 십자가 오른쪽에 안치되어 있다.

 

형구돌의 직경은 1m, 둘레는 4~4.5m이고,

가운데는 한쪽 지름이 25~30cm, 반대쪽 지름이 7cm의 원추형 구멍이 뚫려있다.  

 

  

아래의 형구돌이 세번째 발굴 된 형구돌이다.

 

 

 

 

 

 

형구돌 옆으로 대형 십자가가 보이고,

순교현양비(殉敎顯揚碑)가 세워진 것이 보인다.

 

 

 

 

 

 

 

 

 

 

대형 십자가의 예수님 아래에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 분이 네 어머니 이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복음 19: 26~27

 

 

 

순교현양비와 예배의 제단과 대형 십자가를 나란히 담아 보았다.

 

 

 

대형 십자가 맞은켠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고,

그 아래에는 순례객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었고...

 

느티나무 아래 의자에서 바라보는 대형 십자가상~!

 

 

 

 

그 전체를 파노라마로 담아 보았다.

성모 마리아와 형구돌, 그리고 순교현양비와 대형 십자가,

커다란 느티나무가 주욱 둘러서 있는 가운데에는 새파란 잔디가 예쁘게 깔려 있었다.)

 

 

 

대형 십자가가 있는 곳에서 안으로 더 들어 가니 성인 황석두 루카의 동상이 서 있다.

성인 황석두 루카에 대하여서는 설명표지판으로 대신한다.

 

 

 

 

 

 

 

 

성인 황석도 루카의 동상을 지나니 오른쪽으로 아까 내가 들어온 '사색의 길'과 연결되는 길이 보이고,

 

 

 

또 한쪽으로는 저멀리 성인들의 모습이 세워진 것이 보이는 마당이 보인다.

 

 

아래의 커다란 나무 앞으로 가면 예수님이 팔 벌리고 모두를 맞이 하는듯한 상이 있다.

 

 

 

 

저 큰나무 쪽으로 가면서 오른쪽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하나 하나 그려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모두 다 담아 올 수는 없어서 몇개만 올려 본다.

 

 

 

 

성인 황석두 루카의 묘와 다섯성인상, 그리고 예수님의 상이 있는 곳이다.

 

 

 

팔을 벌리고 모두를 맞이하는 듯한 예수님상이 세워져 있고,

 

 

 

 

 

 

예수님상과 '다섯 성인상과 반석'이 마주 보고 있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순교한

다블뤼(안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르(오 베드로) 신부, 위앵(민 루카) 신부,

황석두(루카) 회장, 장주기(요셉) 회장 등 다섯 성인상과

성인들이 서울로 압송될 때,

그리고 다시 서울에서 갈매못으로 압송되는 도중에 쉬어 갔다는 반석이다.

 

당시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회장이 이 반석 위에서

구경꾼과 그들 사이에 숨어 있는 신자들에게 천주의 진리를 강론하자,

포졸들 조차 그 위엄에 눌려 감히 이를 말리지 못했다고 한다.

 

또 비신자(非信者)들 까지도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밝은 도리에 머리를 끄덕이면서

탄복해 마지 않았다는 전승이 내려온다.

 

고(故) 오기선(요셉) 신부가 1970년 12월 2일 충남 아산군 음봉면 삼거리에서 발견하여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안치하였다.

 

 

 

 

 

 

 

성인 황석두 루카의 묘이다.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황루카님을 양자인 황요한이 거두어 고향에 안장되였으나

1968년 10월 6일 병인 순교 복자 24위에 포함되어 시복되고(로마 성베드로성당),

1980년 고향 괴산군 장연면 병방골 평해 황씨 문중 묘에서 유해 확인 발굴하여

1982년 8월 25일 수안보성당에 모셔져 있던 유해를 연풍성지로 모심

1984년 5월 6일 한국 순교 성인 103위에 포함되어 지심

 

 

 

 

성인 황석두 루카의 묘 정면에 있는 형구돌이다.

두번째로 발견된 형구돌이라고 한다.

 

 

 

한국인 초대주교 바오르 노기남 대주교님의 동상도 있다.

 

 

 

초대주교 바오르 노기남 주교님에 대한 글이 적혀 있어 그림으로 대신한다.

노기남 대주교님은 1982년 8월 25일 황석두성인의 천묘식을 주례하셨는데

이것이 주교님의 마지막 공식행사였다고 한다.

 

 

 

주교님 동상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연풍향청(延豊鄕廳)이 보인다.

연풍향청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 13호로 지정되어 있다. 

 

향청은 연풍현 수령을 행정을 보좌하던 조선시대의 자치기구로 이아(貳衙)라고도 한다.

향청의 장을 향정(鄕正) 또는 좌수(座首)라 하여 그 지방의 덕망있는 사람을 임명하였다.

이곳에서는 풍속을 바로 잡고, 향리를 감찰하며 정령(政令)을 시달하고,

민정(民政)을 대변하는 등의 일을 하였다.

그러나 간혹 권한을 남용하여 민폐를 끼치는 예가 많았다 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집으로 숙종17년(1681년)에 처음 지었다. 

조선시대의 현감이 머물렀던 연풍이었기에 남아 있는 건물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조선시대 말에는 형방 관아로, 일제 강점기에는 헌병대 및 주재소로,

해방후에는 연풍지서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1963년 천주교 유지재단이 매입하면서 천주교 연풍공소로 사용되었는데,

용도에 따라 내부 구조가 많이 변형되었다.

이를 1995년에 원형을 살려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천주교 성지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순례객들이 아래 그림의 마당에서 미사를 드리기도 한단다. 

 

 

향청옆에 있는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상이다.

 

 

 

아래 건물은 연풍순례성지 경당과 사무실이 있는 곳이다.

그동안 연풍에 드나 들어도 이곳에 어느새 현대식 건물이 지어져 있었는데도 몰랐다.

 

 

 

 

 

이제 나는 거꾸로 들어오는 입구까지 오게 되었다.

연풍성지 입구에는 성지 순례에 임하는 자세와

순례안내 문구가 들어있는 표지판이 서있다.

 

 

 

찾아가는 길은 아래 안내문에 있는 연풍성지 인터넷 홈페이지를 찾아 가면 자세히 나온다.

 

 

 

다시 '사색의 길'을 거쳐 작은댁으로 돌아간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연풍성지에서 예수님을 만나니 반갑고 마음이 뿌듯하다.

형구돌을 보았을때는 그들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지만,

성루카 황석두님을 비롯한 성인들의 모습을 뵈니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년쯤이면 작은댁 맞은켠의 넓은 공터에 성당이 지어질 것이라고 작은집 동서가 알려 준다.

고향에 이렇듯 좋은 성지가 곁에 있어 너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