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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 고려의 궁궐이 있었던 자리를 돌아보며... 본문

여행/아름다운 강산

강화도에 고려의 궁궐이 있었던 자리를 돌아보며...

노미킴 2012. 9. 8. 00:52

용흥궁공원에서 고려궁이 가까우니 가보라 하여

멋진 대궐을 연상하며 올라갔다.

 

 고려궁 앞에는 공사로 길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입장료를 받는 곳은 대문과 저멀리 떨어져 있어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이 고려궁궐은 강화도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궁궐터로

사적 1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고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읍을 송도에서 강화로 옮기는

1232년(고려 고종19년)부터 다시 환도하는 1270년(원종 11년)까지

39년간 사용되던 고려궁궐터이다.

 

고려가 몽고군의 침략을 피해 강화로 천도하게 되자

최우(崔瑀)는 2000여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이곳에 왕궁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규모는 작으나 궁궐과 관아의 명칭를 개경과 같게 하고

뒷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몽고와 화친하게 되어 환도하게 되자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들을 모두 파괴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왕이 행차시 머무는 행궁을 건립하였고,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 장녕전, 만녕전도 건립하였으나

이 또한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1964년에 사적 133호 '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보수 정비되었다.

 

현재 고려궁지에는 조선시대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강화동종 등만 남아 있다.

 

 

고려궁지 안내판 

 

 

 

정문인 승평문(昇平門)을 올려 보며...

 

 

 

 

 

고려궁지인 이곳에 조선시대에는 여러 관청건물을 세웠다.

1622년(광해군 14년)에 봉선전(奉先殿 :태조 영정을 봉안)을 건립하였으나 병자호란때 소실되었고,

1631년(인조 9년)에는 행궁(行宮)을 건립하였으며,

1638년(인조 16년)에 유수부 동헌을 개수하며,

1654년((효종 5년)에 유수부 이방청을 건립하였다.

 

1695년(숙종 21년) 장녕전(長寧殿), 1713년(숙종 39년) 만녕전(萬寧殿)이 차례로 세워져

조선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다.

 

1782년(정조 6년) 황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왕립도서관인 외규장각을 건립하였으나

병인양요(1866)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 안에 보관 중이던 

서적 200여종 340책을 약탈해 가고 건물은 불태웠다.

 

 

 

 

 

 

 

 

 

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 東軒)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건물이다.

 

1638년(인조 16) 유수 김신국이 수리하였고,

1769년(영조 45)유수 황경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하였다.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현판은 영조 대 명필인 백하 윤순(尹淳)이 쓴 것이다.

 

건물구조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단층집이며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다.

 

 

 

 

 

 

 

 

 

 

 

유수부 동헌에서 유수가 집무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습들...

 

 

 

사진이 흔들렷지만 유수부내에 있는 물건들을 전시해 놓은 것이라 올려 본다.

 

 

 

강화유수부 동헌앞의 커다란 나무가 인상적이었다.

한여름의 열기를 식혀줄 만큼 넓은 그늘과 푸르른 빛이 보기만 하여도 시원해 지는듯 했다.

 

 

 

 

외규장가으로 올라가 본다.

 

 

외규장각은 조선 정조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치된 곳으로

특히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던 곳이다.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특별하게 비단을 사용하고,

종이는 고급 초주주(草住紙)를 사용하였으며,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하였다.

 

병인양요 때에도 외규장각에 보관중이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프랑스군의 눈을 자극한 것도 채색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프랑스에서 약탈해 간 서적들은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고 하는데

 몇차례의 회담을 통해 반환해 줄것을 요구하였으나

준다고 하면서도 아직까지 미루고 주지 않고 있다고 한다.

 

지금의 외규장각은 1995년부터 2001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2003년에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아래 관람 절차를 보지 않고 들어가는 바람에 거꾸로 보는 우를 범하였다.

다른 사람의 관람을 위해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올리고

 

 

외규장각 안에 있는 것을 다 담아 올 수는 없어서

몇가지 눈에 띄는 것을 담아 와서 올려 본다.

 

 

 

 

 

 

 

 

 

 

 

 

 

 

 

 

 

 

외규장각 앞에서 바라보는 고려궁지의 모습이다.

아래로 이방청이 보이고 이방청 가기전에 강화부종각이 있다.

 

 

왼쪽으로 강화유수부 동헌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옛날에는 고려궁지에 속했을 것같은 민가도 보인다.

 

 

 

 

강화동종(江華銅鍾)은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그 후 1711년(숙종 37) 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것으로 

보물 제 11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높이 198cm, 입지름 138cm로 조선 후기 동종으로는 큰 규모이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줄이 둘러 있고, 그 아래에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종각은 당시의 강화산성 남문 주변인 김상용 순절비 자리에 있었던 것을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때 고려궁지로 이전되었다.

 

동종은 원래 성문(城門)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데 사용되었으며

근래에는 3.1절, 광복절, 제야의 종 등 일년에 세번 타종되었으나

1999년 종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하지 못하게 되자 강화 동종을 복제하여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옮겨 보관 전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복제품이란 말이지...^^*

 

 

이제 강화유수부 이방청(江華留守府 吏房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강화유수부의 행정 실무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1654년(효종 5) 유수 정세규가 세웠고, 1783년(정조 7)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수리하였다.

1915년 이후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72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 역시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다.

구조는 ㄷ자형 단층기와집으로 방이 8칸, 마루가 12칸, 부엌이 1칸으로 모두 21칸 규모이다.

 

 

 

 

 

이방청의 뒷모습...

뒤에도 툇마루가 달려있다.

 

 

 

 

 

이렇게 예쁜 정원을 거쳐 나오면...

 

 

저만큼 외규장각이 보인다.

뒤에 보이는 산을 송악이라 하였다고 했던가...

 

 

 

이제 승평문을 향하여 나아간다.

예전에는 커다란 궁궐이었다는 이곳에

강화유수부 동헌과 외규장각, 그리고 이방청만 자리하고 있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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